쿠훌린과 아처, 각자에게 최악의 첫인상을 남기고 둘의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싫은 상대가 보인다고 굳이 아처가 상점가로 산책하러 가지 않을 이유도 없어 쿠훌린이 있든 말든 아처는 무시하고 상점가를 거닐었다. 좀 더 젊었다면 고양이 모습으로 장난을 친다든지 일부러 싸움을 걸었겠지만, 나이도 나이인지라 아처에게 지금은 그럴 혈기는 없었다. 그런 아처의 모습을 보며 쿠훌린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지 둘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처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들려온 정보로는 쿠훌린은 아일랜드에서 온 교환학생으로 후유키 대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부모가 대학 등록금은 내주고 있지만 젊을 때 고생해봐야 한다는 신조인지 생활비는 직접 벌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타지에 와서 생선가게 알바를 하고 있다. 아처는 쿠훌린의 인성 평가는 둘째치고 사정은 젊은데 딱하다고 생각했다.
쿠훌린이 상점가에 있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을 때 갑자기 안 보이게 되었다. 며칠 동안 안 보이니 이상하긴 했지만, 본분은 학생이고 과제나 시험 준비 때문에 쉴 수 있으니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햇볕이 따뜻한 날 일광욕을 하기 위해 아쳐가 공원을 찾아갔을 때 아쳐가 애용하는 벤치에 누가 먼저 앉아있었다. 아처가 낸 소리 때문에 앉아있던 사람도 아처 쪽을 봤고 눈이 마주쳤다. 요 며칠 보이지 않던 쿠훌린이었다. 다른 벤치에 갈까 했지만, 그 벤치가 햇볕을 쬐기엔 틍등석이고 저 대형견 때문에 자기가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석연치 않아 그냥 쿠훌린 옆에 자리를 잡았다.
“뭐야 너냐....”
아처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아처가 그런 태도를 보이니 쿠훌린도 가만히 있었다.
“하아~”
아처는 쿠훌린이 뭘 해도 반응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큰 한숨에 자기도 모르게 귀를 세웠다.
“고양이한테 말하는 거도 이상하지만 이야기할 상대도 없으니까 들어줘라.”
아처가 들어주겠다 한 거도 아닌데 쿠훌린은 혼자 주절대기 시작했다. 최근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푸념을 늘어놓으며 중간부터는 몸을 둥글게 말고 눈을 감은 아처를 쓰다듬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쿠훌린의 핸들링은 동물을 키워본 사람의 실력이고 기분이 나쁘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 쿠훌린이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타지에 와서 고생하는 이야기는 안쓰럽기도 해서 아처는 계속 들어주었다.
“대학 일도 대학 일인데 말이지, 지금 제일 큰일은 알바에서 잘려서 다음 달 월세가 위험해. 부모님은 내가 길거리에 나앉아는다 해도 돈 보내주실 분들이 아니고..... 하아~”
아처가 한쪽 눈만 떠서 보니 쿠훌린 주머니에 반짝이는 열쇠고리가 있는 게 보였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서 쿠훌린이 옆을 보니 아처가 쿠훌린의 열쇠고리를 물고 벤치 아래로 뛰어내렸다.
“너 이 자식!”
무슨 상황인지 쿠훌린이 파악했을 때 아처는 열쇠고리를 문 채 가버렸고 쿠훌린은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쳤지, 저 고양이한테 이야기한다고 뭐가 된다고!”
아처는 담을 넘고 지붕을 건너며 꽤 빠른 속도로 가는 중인데 그걸 따라오는 쿠훌린을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어느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 아처는 가게 문을 긁었다. 긁는 소리 때문인지 가게 문이 열렸다.
“어머, 시로니?”
나온 사람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성이었고 여성은 아처를 안아 올렸다. 그 상황을 보고 쿠훌린은 멈춰서 숨을 골랐다.
“입에 뭘 물고 있는 거니?”
여성이 아처 입에 물린 열쇠고리를 잡으니 아처가 입에서 열쇠고리를 놓았다. 열쇠고리를 보다가 여성은 쿠훌린이 서 있는걸 보았다.
“혹시, 이 열쇠고리 주인이신가요?”
“아, 네, 그 고양이가 갑자기 물고 도망가서....”
“시로가 그런 장난을 치는 아이가 아닌데?”
아처가 여성의 품에서 뛰어내리자 여성은 쿠훌린한테 열쇠고리를 건네주었다. 열쇠고리를 건네받으며 쿠훌린의 눈에 유리창에 붙은 종이가 보였다.
“혹시 지금 창문에 붙어있는 아르바이트 모집 이미 구하셨나요?”
“아뇨, 아직...”
“지금 제가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중이라 지원하고 싶은데”
“그래요? 그럼 지금 면접 보게 들어오세요.”
여성분의 시원스러운 반응에 쿠훌린은 가게로 들어가 바로 면접을 봤다. 가게는 원래 위치가 상점가에서 떨어진 곳이라 단골이나 아는 사람만 오는 조용한 곳으로 원래 점주인 자신이 혼자 운영을 했는데 최근 젊은 사람들한테 소문이 나서 손이 부족하게 되었다고 한다. 커피나 디저트를 파는 곳으로 차도 내는 곳인데 마침 아이리쉬 차를 취급해 쿠훌린이 아일랜드 유학생이라는 사실에 점주는 기뻐했다. 여성은 현지인의 실력이라면 믿을 수 있다며 쿠훌린한테 서류를 갖고 와서 내일부터 일하라고 했다. 쿠훌린이 가게를 나왔을 때 아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