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 납치 사건 이후 에미야와 쿠훌린의 일상에서 변한 점은 없었다. 쿠훌린의 지시에 따라 수련을 하고 마술 공부를 한다. 집 청소, 빨래는 나눠서 하고 요리는 에미야, 장보기, 기타 물건 구해오기는 쿠훌린이 한다.
옆 마을에 온 쿠훌린은 에미야가 써 준 메모를 보며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다. 오늘 저녁의 마지막 재료를 구매한 순간 두 남자가 하는 대화가 쿠훌린 귀에 들려왔다.
“저번부터 골치를 썩이던 짐승을 누가 오늘 낮에 처리했다는 거 같군.”
“아니 전사 열 명이 달려들어도 잡지 못한 그걸 누가 해낸 거야?”
“그게 말이지 놀랍게도 굉장한 미인이라더군. 그것도 창 한 자루로 해냈다는 거 같아.”
“오~ 그건 놀라운 이야기인데! 나도 들려줄 수 있어?”
쿠훌린은 남자들의 대화에 꼈다.
* * *
해가 지고 있는데 쿠훌린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길 일은 없겠지만 에미야는 걱정되었고 습관처럼 얼굴에 핀 꽃을 만졌다.
“이거야 세탄타가 빠질 만도 하겠어.”
그 목소리는 높으며 요정의 웃음소리와는 다르지만 맑은 목소리였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에미야는 주위를 둘러봤고 뒤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는 여성을 보았다.
“..... 평범한 분은 아닌 거 같은데 누군지 여쭈어도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흠, 제대로 차려입은 거도 아닌데 알아보다니 안목은 있군.”
제대로 차려입지 않았다고 했지만, 상체를 덮는 후드 아래로 보이는 옷은 분명 높은 급의 마술 예장이었다. 에미야가 아무리 마술사라고 칭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숙하더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흠, 세탄타한테서 못 들은 것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림자 나라의 여왕이자 세탄타의 스승인 스카사하라고 한다.”
그림자 나라, 저쪽의 세계. 그곳의 여왕이라니 에미야는 전설의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 나에 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는 건 세탄타가 아명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은 거 같군.”
“아명....?”
* * *
붉은 창의 미인, 그 말을 듣고 쿠훌린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두 사람. 마을 남자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소문의 주인공은 스카사하였다. 스카사하가 멧돼지 퇴치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리는 없고 진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근처에 왔다면 분명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에미야와 만나게 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스카사하가 에미야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무슨 짓을 안 하더라도 좋은 일은 없을 걸 알고 있다. 급하게 에미야가 수련을 하던 장소로 갔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어 집으로 뛰어갔다. 문을 거칠게 열고 집안으로 뛰어들었는데 스카사하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늦어, 세탄타. 얼마나 기다리게 할 작정이었냐.”
“허억-온다고-허억-말도 안 하고-허억-”
전속력으로 뛰어온 쿠훌린은 벽을 붙잡고 헐떡이며 겨우 말을 꺼냈다.
"다과는 이걸로 괜찮은가, 스카사하."
"오오, 그거 맛이어 보이는군"
"이제야 왔나, 너의 찻잔도 꺼내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에미야는 과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도로 주방으로 갔다. 매서운 눈으로 스카사하를 쳐다보며 자리에 앉은 쿠훌린과 대조되게 스카사하는 태평하게 차를 마셨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스승이 오랜만에 제자 얼굴을 보러오면 안 되는가?"
"안 될 건 없지, 근데 내 얼굴을 보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
"못 본 사이 조금은 똑똑해 진 거 같구나, 세탄타."
스카사하는 찻잔을 내려놓고 웃었다.
"귀찮은 일이 생겨서 말이지, 이 스승 대신 해주련?"
"귀찮은 일은 이쪽도 사양이야."
"내용도 안 들어보고 매정하긴, 거절 이유는 에미야려나?"
에미야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쿠훌린의 눈빛이 바뀌었다.
"무서운 표정 짓지 말고, 에미야한테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어."
"이 찻잔으로 괜찮나, 쿠훌린"
"....... 응"
쿠훌린이 한마디 하려 했지만 에미야가 찻잔을 들고 돌아와 할 수 없었다.
"좋은 타이밍이군. 에미야, 내가 쿠훌린에게 부탁 하나를 하려는데 너를 여기 혼자 두긴 불안한 거 같아서 말이지. 세탄타가 아니면 곤란한 일이라 같이 좀 가주겠나?"
"곤란한 일이라면 같이 가주고 싶지만 보다시피 이런 상태라...."
에미야는 얼굴의 꽃을 가리켰다.
"부탁하는 입장인데 그 정도는 챙겨줘야지. 내 예장을 주마."
스카사하는 걸치고 있던 후드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머리까지 걸치면 주위에서 인식하기 어려워지는 효과가 있어서 투명 인간같이 있을 수 있지. 벗으면 다시 주위에 인식되고"
"그렇다면..."
"어이, 난 한다고 한 적 없어."
"내가 예장 하나 가지고 너한테 부탁하러 왔다고 생각하는가?"
"설마, 그럼 나한테 뭘 대가로 줄지는 들어나 보자고."
"네가 드루이드로 전향하면서 되찾으려던 걸 돌려주지."
쿠훌린의 눈이 커졌다.
"진심이냐?"
"나를 피해가며 네가 되찾으려고 한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네가 사고를 쳐서 빼앗은 거지만 100년이면 충분히 반성했다고 생각한다."
"......부탁이 뭔데"
"도난당한 물건을 찾아주길 바란다."
"나한테 부탁할 정도면 보통 물건은 아니겠고 그 물건이 뭔데?"
"요정왕이 나에게 선물로 준 귀걸이다."
"아.... 그 별난 모양새의...."
스카사하가 말한 물건을 쿠후린도 아는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모양새는 그래도 좋은 물건이다. 그 귀걸이는 어떠한 재능이건 귀걸이를 착용한 자가 가진 재능을 더 뛰어나게 해주어 재화를 불러오지."
"예를 들자면 미술가는 그림을 더 잘 그리게 해주고 마술사는 마술을 더 잘하게 해줘서 성공하게 해준다는 거지."
스카사하의 설명으로는 이해하지 못 한 에미야를 위해 쿠훌린이 말을 덧붙였다.
"그건 확실히 누군가는 훔쳐서라도 갖고 싶을 물건이군."
"그래 봤자 모양새가 이상해서 스승님은 안 썼지만"
"어찌 됐든 요정왕이 선물한 물건이다. 없어지면 곤란해."
쿠훌린은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 스카사하한테 다른 질문을 했다.
"그래서 그림자 나라의 여왕님의 보물을 훔쳐간 간 큰 놈은 도대체 어떤 놈인데?"
"처음 훔쳐간 녀석은 이미 죽었다."
"죽어?"
"그 녀석의 성공의 비밀이 그 귀걸이라는 걸 안 자가 죽여서 빼앗아 갔지."
"......."
"그렇게 두 번째 훔쳐간 녀석은 절름발이가 되어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살게 되었다."
"그거 설마...."
"그 설마다, 이상하다 싶어서 그 귀걸이를 만들었다는 장인을 찾아 슬쩍 물어보니 선물을 주기 전에 요정왕이 도난 방지를 해두었다고 하더군. 이전 주인한테서 부도덕한 방식으로 그 귀걸이를 가져갈 경우 반드시 불행해지게 되어있다."
"그걸 찾아오는 우리는 괜찮은 거냐?"
"그 부분은 세탄타, 네가 잘 해봐야지."
"역시 귀찮은 일이잖아!"
"거절할 건가?"
"거절 못 할 조건을 걸어놓고.... 진짜 못 이기겠다니까."
쿠훌린의 대답을 들은 스카사하는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띠웠다.
"정해진 기간은 딱히 없지만 가능한 빠르면 좋겠군, 없어졌다는 걸 요정왕한테 들키면 골치 아파져."
"결국 빨리 찾아오라는 소리잖아."
"드루이드가 되더니 이해가 빨라졌군."
2화 올리는데 7개월 걸렸는데 3화는 1개월 밖에 안 걸렸다니 놀라온 발전이네요. 예고했던 신캐는 스승님입니다! 마을에 계속 있게할까 나가게 할까 고민하다 결국 나가게 했습니다.... 마을에만 있으면... 소재가 한정되어서...ㅜ 그렇게 스카사하는 퀘스트를 주기위해 등장하였고 앞으로 등장할 기회가 또 있을지는 모르겠네여...
땅에 뿌리가 박혀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일하고 싶어 하고 항상 도움이 되고 싶다는 장미가 말했다. 지구라면 분명 장미가 아직 씨였을 때 있던 곳, 장미가 태어난 큰 별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볼 수 있을 거야.”
“.....”
“싫은 건 알겠지만 어른이 되어야 하잖아.”
있는 거라고는 장미 한 송이와 야채밭, 요리에 이용하는 화산 두개 밖에 없는 작은 별의 왕자, 미도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을 만나는 거도 어른이 되는 거도 싫다. 꿈도 하고 싶은 거도 없는데 어른이 되어야 한다니.
하지만 결국 장미의 끈질긴 설득 끝에 미도리는 지구로 가기로 했다. 밭을 잘 정돈 하고 장미를 위해 유리막과 여러 가지를 준비했지만, 장미는 오히려 밭과 별은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다. 미도리는 자신의 별을 떠나 지구를 향했다.
지구는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한 번에 갈 수는 없었고 도중에 여러 별을 거쳐 갔다. 새하얀 황제의 별, 새까만 왕의 별, 옷을 만드는 제왕의 별, 끊임없이 새로운 마술을 보여주는 광대의 별, 별 지면에 노래를 작곡하는 왕의 별, 바쁘게 서류 작업을 하는 안경 대신의 별. 6개의 별을 걸쳐 7번째에 지구에 도착했다.
지구에는 장미가 말한 대로 많은 사람이 있었다. 어딜 가도 사람이 많았고 인파에 익숙하지 않은 미도리는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갔다. 사람이 드문 곳에서 큰 저택을 발견했는데 저택 정원에는 장미가 가득했다. 지구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장미도 가득하구나 하고 감탄하는데 장미들이 미도리를 보고 소란을 피워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피해 목적지 없이 걷다 보니 밀밭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사람인가 했더니, 남자잖아.”
첫 대면부터 무례한 말을 하는 여우를 보며 미도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기 인상을 찌푸리고 싶은 건 내 쪽이거든.”
“여기 사는 분인가요?”
“음~ 아니, 여기는 그저 산책 오는 곳. 털색이 밀색하고 비슷해서 여기 있으면 사냥꾼이 날 찾지 못하거든.”
미도리가 지구가 아닌 저 멀리 떨어진 별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우는 놀라긴 했지만 미도리 별에 흥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당신은 여기서 뭘 하는 건가요?"
"날 길들여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
"길들여요?"
길들인다는 건 무언가를 보고 그 사람이 생각난다는 것, 유일한 존재가 된다는 것, 그 사람을 만나는 게 기다려진다는 것. 여우는 멋진 일이라며 설명했지만 미도리에게는 와 닿지 않았다.
"음... 이곳에는 밀밭 말고는 더 없는 거 같아서 가볼게요."
"잘 가, 남자라서 실망했지만 오랜만에 나를 해치려 하지 않는 인간? 을 만나서 한마디만 더 해줄게."
길들여지는 건 멋지고 행복한 일이지만 고통스럽기도 한 일이야.
***
그저 발길 가는 대로 걷다 보니 미도리는 어느새 모래가 가득한 사막 한가운데 있었다. 시끄러운 게 싫어서 되도록 조용한 길을 골라 걸었더니 사람도 장미도 여우도 없는 곳에 와버렸다. 조용한 건 좋지만 햇볕이 따갑고 물이 없어 조금 힘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미도리는 소리와 연기가 난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지구를 돌며 본 자동차와도 기차와도 다른 탈것이 있었다. 길쭉한 몸통에 양옆으로 긴 지느러미 같은 게 달린 탈것. 탈것 앞에 있는 창문이 열렸다. 미도리는 도망갈까 고민했지만, 창문을 열고 사람이 나왔다.
“죽을 뻔했다!”
큰 소리로 말한 청년은 주위를 보다 미도리와 눈이 마주쳤다. 미도리는 도망가지 않은 게 후회됐다.
“오오, 이런 곳에 사람이 있다니! 역시 히어로에게는 항상 희망이 있다는 건가?”
예의상이라도 괜찮은지 물어보려다 그럴 필요 없이 청년이 멀쩡해 보여서 미도리는 입을 닫았다. 아니 오히려 추락의 충격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것 아닐까.
“소년, 여기가 어딘지 혹시 아는가?”
“..... 사막이요.”
“음, 그렇지 사막이지! 그런데 내가 알고 싶은 건 좀 더 자세한 부분이라서 말이야. 어디에 있는 사막인지 말해줄 수 있나?”
“그건 잘.....”
“설마, 소년도 사고로 나와 같이 이곳에 있는 것인가. 그건 큰일이군!”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고 정처 없이 걷다 이곳에 도착한 건 맞지만 길을 잃은 건 아니다. 미도리는 언제든지 자신의 별에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청년과 대화를 하면 지칠 거 같아 대꾸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자기소개를 안 했군. 나는 불타는 불꽃과도 같은 히어로, 모리사와 치아키다!”
“...... 타카미네 미도리입니다.”
"타카미네군, 잘 부탁한다, 타카미네!"
치아키는 비행기라는 탈것을 타고 지구를 돌아다니며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는 히어로라고 한다. 여행 중 만난 누구와도 다른 새로운 유형의 사람이었다.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면 장미는 기뻐할 테니 미도리는 치아키와도 잠시 같이 있기로 했다. 그런데 치아키는 여태까지 만난 누구와도 다르고 귀찮은 사람이었다. 도움이 필요 없다는 미도리를 도와주려고 하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얼마 없는 치아키의 식량을 나눠주기도 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히어로니까’라고만 답했다.
사막에서도 치아키는 바빴지만 미도리는 한가했다. 치아키는 식량이나 물을 찾거나 비행기를 고치고 지나가는 사람을 도와주며 하루를 보냈지만 미도리는 비행기 그늘에 앉아있거나 가끔 심심하면 치아키를 따라가 물과 식량을 찾았다.
하루, 이틀, 어느새 미도리와 치아키가 같이 지낸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미도리는 어쩌다 자신의 별을 떠나 지구에 오게 된 사정을 이야기하게 됐다.
“꿈이 없다고, 그럼 히어로를 목표해보면 어떤가?”
다음 날 아침 미도리는 후회했다. 오늘부터 히어로 지망생이라며 치아키가 미도리를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그늘에 앉아있는 미도리를 두고 혼자 다녔지만, 이제는 항상 어떤 날이라도 미도리를 억지로 데리고 다녔다. 치아키를 따라다니는 건 힘든 일이었다. 미도리는 지치고 힘들어 그만두고 싶었지만, 치아키는 히어로는 힘들다는 이유로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치아키의 비행기가 사막이 추락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비행기가 완전히 고쳐졌다. 이런 사막에서는 부품을 구하기 힘들고 뙤약볕 아래에서 수리하는 일도 고생스러운 일이다. 아마 치아키가 아니었다면 고치는 데 더 시간이 걸렸을 고장이었다. 그러나 치아키는 해냈고 비행기는 언제든지 하늘을 날 준비가 되었다.
“넌 어떻게 하겠는가, 타카미네.”
“저요?”
“음,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히어로의 도움이 필요하니 비행기가 고쳐졌다면 난 한시라도 빨리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가야 한다.”
“...... 왜 항상 그러듯이 억지로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는 거예요?”
치아키는 머리를 한 번 긁더니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타카미네가 목표가 없다고 해서 ‘히어로’라는 한 가지 선택지를 추가해 주었다. 여태까지 타카미네와 같이 히어로 활동을 한 건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튜토리얼’이겠지. 타카미네가 ‘튜토리얼’을 마치고 히어로가 되어 나의 동료가 되어준다면 기쁜 일이겠지. 하지만 강요할 수 없어.”
“여태 끌고 다녀 놓고요?”
“그건 ‘튜토리얼’이라서 이다. 막 게임을 시작한 초보자에게 누를 버튼을 정해주고 그것 외에 못 누르게 하며 플레이법을 가르치는 것과 같아. 하지만 게임이 시작되면 플레이어가 스스로 선택을 해서 움직여야 한다. 그게 어른이 된다는 거야. 이제는 너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타카미네.”
“어른이 되면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장미가 말해서 지구에 왔지만, 적당히 할 생각이었어요. 내 별에서 야채밭을 가꾸며 할 수 있는 편하고 적당한 일을.”
“야채밭에 가지만 없으면 완벽할 거 같은데 말이야.”
“가지는....하아.... 히어로는 힘들어요, 생판 모르는 타인을 도와야 하고 나도 힘든데 그 타인을 챙겨줘야 하고,”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런데 일이 힘든 걸 떠나서 히어로 일이 싫었나?”
“싫지.... 않았어요, 사실 같이 히어로 일을 하는 건 즐거웠어요.... 하지만 내 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지구에서 히어로가 되려면 야채 밭을, 장미를 두고 와야 해요.”
장미와 밭을 위해 해둔 일은 여행 동안만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이대로 지구에 계속 있으면 밭에는 잡초가 자라고 장미는 말라 죽는다.
“그렇다면 별에 돌아가는 게 어떤가?”
“히어로를 하지 말라고요?”
“그게 아니라 가서 다시 밭과 장미를 돌봐주고 별을 떠날 준비가 된다면 지구로 돌아오라는 소리다, 너의 마음을 포함해서.”
치아키의 제안에 미도리는 눈이 커졌다.
“만약 마음의 준비가 오래 걸린다면 그만큼 늦게 와도 좋아, 나는 기다릴 수 있다.”
“.... 너무 오래 걸리면 기다린다고 한 약속 자체를 잊어먹을 거예요.”
“잊지 않는다고 맹세하지! 너의 별은 분명 저쯤 있다고 했나? 매일 밤 네가 있는 별을 찾으며 약속을 기억하겠다.”
치아키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치아키가 가리킨 방향은 전에 미도리가 자신이 별이 있는 곳이라고 말해준 방향이 맞았다. 지나가는 소리로 한 이야기였고 미도리는 치아키가 잊었을 줄 알았는데 치아키는 잊지 않았다.
“그러니 다녀와라, 타카미네.”
미도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별로 걸어가기 위해 걸었다. 걷다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치아키는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오랫동안 저 미소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미도리의 가슴 한편이 쓰렸다. 그런데 치아키는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미도리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한참을 걸었을 때 다시 뒤를 돌아보니 치아키는 웃고 있지 않았다. 울고 있었다. 아마 더 이상 미도리가 자신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흔들던 손을 내리고 울고 있었다.
바보 같은 사람.
언제까지고 기다린다고 했지만, 미도리가 준비를 마치는 게 언제가 될지는 치아키로는 알 수 없다. 기다린다고 했지만, 그것은 기약 없는 약속이다. 문뜩 미도리는 이전에 만났던 여우의 말이 생각났다.
‘길들여지는 건 멋지고 행복한 일이지만 고통스럽기도 한 일이야.’
치아키는 미도리에게, 미도리는 치아키에게 길들여진 것이다. 치아키도 미도리도 함께한 시간은 즐겁고 행복했지만 행복한 만큼 헤어지는 건 고통이었다. 다시 한번 뒤돌아보면 치아키한테 돌아갈 거 같아 미도리는 앞만 보며 뛰었다.
배포한 책 표지와 반전 색 표지입니다.
원래 이걸로 내려고 계획했는데 내지 종이로는 기계상 문제로 올블랙은 안된다고 하네여.... 그래서 흰색 버전으로 냈는데 미련이 남아서 웹공개는 검은색 버전으로 올립니다.